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문단 편집) === 보급 체계 분리 === 그나마 당시 기술로 어쩔 수 없이 육군과 해군이 다른 장비를 쓰는 것은 이해하더라도, 최소한도로 서로 보급물자와 전략 물자 정도는 공유가 가능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무기와 그 탄약 등의 보급체계를 따로국밥으로 스스로 어지럽히기도 했다.''' 위에서 이야기한 구경이 다른 탄약과 각군에 따로 생긴 공수부대 등이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전쟁]] 기간에 점령한 동남아시아의 유전을 각각 따로따로 배정받아서, 각자 자기가 보유한 정유시설로 직접 정유해서 사용했다. 더 웃긴 것은 해군이 배정받은 유전은 상당수가 시설이 파괴돼서 복구할 때까지 사실상 채유 및 정유가 불가능해서 석유가 부족한 상황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군측에서는 전혀 도와줄 생각도 없었고 태평양 전쟁의 그 극심한 석유부족 속에서도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을 도입한 이유는, 같이 쓰게 하면 분명히 배분문제로 인해 큰 싸움이 날 것이기 때문에 일본군에게는 이 방법 이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엔 별의별 기름[* 정어리 기름, [[송근유]] 등 귤껍질 기름도 모았다고 한다. 물론 이런 불량물들을 받아먹은 기계들의 성능이 어땠을지는 [[송근유#s-3.1|항목]] 참조.]까지 다 짜내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수송 라인 자체도 따로 놀았다. 태평양 전쟁처럼 바다가 전장인 곳에서는 선박을 이용한 해상 운송체계가 필수이다. 다른 국가에서는 이를 민간 정부의 해운 관련 부서 및 해군 소속 수송 부서에서 이를 담당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이는 해군 자체의 보급 라인이 맡았고, 여기에 민간 정부의 전쟁선박국(War Shipping Administration)이 민간 함선들을 통제해서 수송 라인을 지원했다. 그런데 일본은 이 조차도 육군과 해군이 따로 놀아서, 일본 육군에선 육군선박사령부라 하여 해상 운송을 담당하는 부서가 따로 있었다. 참고로, 나치 독일도 보급물자에 한해서 비슷한 문제에 직면했었는데, 육해공군이 각자 자기들만의 공장을 가지고 물자를 생산했다. 예를 들어 해군 베어링 공장이 폭격을 맞으면 해군은 베어링이 모자라 고생하지만 육군은 베어링이 남아 돈다든지, 반대로 육군이 타이어 공장을 폭격 맞으면 육군은 타이어가 모자라지만 해군은 타이어가 있는 식이었다. 독일도 여기에 문제를 느끼고 이를 해결하려 노력했으며, 최소한 무기의 탄환이나 규격 등은 통일이 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도 저런 문제는 많았다. 예를 들어 독일 해군의 30㎜ MK 303 기관포를 둘러싼 육군과 공군, 해군간의 알력과 모자란 원자재를 가지고 각군이 싸우다 못해 [[슈페어]] 군수장관이 겨우 중재를 했었고 미군도 역시 해군과 육군의 건함과 운용교리 충돌도 있었다. 육군은 수송함, 상륙함을 늘리고 상륙지에 대한 함포사격을 더 화끈하게 해줄 것을 원했지만 해군은 당연히 [[반 다크홈|Fuck↗ You↘]] 일본군과 맞붙은 태평양 전선의 미 육군/해병대 vs 미 해군의 협조도를 살펴보면 이 항목에 일본군의 비교대상으로 올리는 것 자체가 미군에 대한 모독이다. 미군이 태평양전선에서 공세로 돌아선 초기인 1943년 중반부 길버트 제도 상륙 시에는 직접 상륙전을 치르는 육군/해병대와 공/해역 제압 및 해상지원을 맡은 해군 사이에 불협화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이는 육/해군의 대립 때문이라기보다는 대규모 [[상륙작전]]을 뒷받침할 경험과 교리 부족 탓이었다고 보야아 한다. 실제로 [[타라와 전투|길버트 제도의 타라와에서 해병대의 피로 얻은 교훈을]] 적극 반영한 1944년 이후의 마샬 군도(콰잘린, 애니웨톡), 마리아나 제도(괌, 티니안, 사이판), 팔라우 군도(펠렐류), 오키나와 공략에서 상륙부대와 상륙함대의 협조도가 문제가 된 예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문제라면 상륙부대 내의 육군과 해병대의 고위 지휘관들의 알력이 있었다. 이것도 스미스vs스미스로 유명한 사이판 전투 정도에서나 불거진 문제. 태평양 전역을 총지휘한 체스터 니미츠 제독부터가 통합군적 사고를 무척 강조하고 직접 실천한 인물이었다. 태평양 전쟁의 다른 한 축을 맡았던 육군의 맥아더 역시 남태평양의 뉴기니 전선에서부터 필리핀의 레이테, 루손에 이르기까지 휘하에 배속된 해군 지휘관들을 극찬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런 마찰이 있었음에도 다른 나라는 다들 중재자나 중재기관이 있어서 완만하게 협의를 도출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은 그런 거 없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은 보리밥의 비타민B[* 그 당시 아직 비타민이라는 개념은 정립되지 않았지만 민간요법과 직접적인 실험으로 효과가 있단건 알았다.]가 각기병을 예방한다는 사실을 알아 보리밥을 혼식했지만 일본 육군은 해군을 믿지못해 일편단심 흰쌀로 통일하여 수만명의 각기병 사상자를 내버렸다.[* 사실 군대에 입대하는 이유중에는 [[이팝에 고깃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이팝에 고깃국]]이 먹고싶다는 이유도 있어서 병사들 기분맞출려고 한 것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